지금 세상에는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라는 견해, 주의, 학설, 통설 따위의 설(說)이 난립해 있고, 또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말하는 주장(교훈, 종교)들이 각기 진실이라 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설(說)과 주장(主張)의 춘추전국시대에 절대 진리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게 바로 각기 말하고 주장한 것에 대한 증거를 만민 앞에 제시하는 일입니다. 재판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호사를 잘 선임하고 또 든든하고 막강한 배경(재물, 권세)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하나, 확실한 증거 앞에서는 아무리 그럴사한 합리적인 논리나 든든한 배경들도 모두 두 손 들고 항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과학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들이 바로 말하고 주장한 것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과연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이사야 41:21~24) 하심 같이, 신(神)이든 과학자이든 사람이든 간에 무지하고 철부지한 사람들 앞에 무조건 자기 말이 옳다고 우길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이 말하고 주장한 대로 일이 이루어진 증거만 제시하면 그게 바로 올바른 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이나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일들에만 증거가 필요하고, 각 사람의 심령에서 발생된 말(주장)의 옳고 그름을 밝히는 일에는 증거가 필요 없고, 오직 육적인 힘이나 술수나 권세나 다수(多數) 따위만 필요한 줄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심령에서 발생된 말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일에는 증거가 필요 없고, 다만 얼마나 크고 강하고 많고 교묘한 수법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는 말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십니다. 말의 증거란, 복이라고 말하였으면 복에 걸맞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 그 증거이고, 생명이라고 말하였으면 어떠한 죽음이든 다 이기고 사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정직한 마음을 지닌 분(하나님)은 남들도 자신처럼 정직할 줄 믿기 때문에 상대방이 하는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자신의 말도 상대방이 믿어 줄 줄 알고 말합니다. 생소한 지역을 여행하는 나그네는 그 곳을 지나가는 행인에게 비행장을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곳 지리에 밝은 행인은 어떤 교통 방법으로 어떻게 가라고 일러 줍니다. 묻는 사람도 상대방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묻고, 대답하는 사람도 자기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대답합니다. 이처럼 정직한 사회의 사람들은 어떤 일과 분야에서는 자기 자신이 유능하여도 다른 일과 분야에 대해서는 무지무능하기 때문에 상생협력하는 차원에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거짓 된 자들은 남들도 자신처럼 거짓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항상 상대방의 말을 듣긴 들어도 미심쩍어 합니다. 그래서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며 시험 삼아 묻기도 하고, 또 기존에 알고 있는 것도 그릇된 거짓이기를 바라며 대답하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에 대한 효능이 죽음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며 어리숙하게 물었고, 사람들 또한 선악과에 대한 효능이 반드시 죽음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들어 알면서도 그것이 거짓이길 바라며 "죽을까 하노라"(창세기 3:3)고 적당히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근본적인 거짓말장이라는 증거이며, 흙으로 빚어진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본성적으로 싫어한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거짓말의 원조인 사단은 지금까지도 거짓말을 꾸며내어 말합니다. 그리고 기독인들은 만물의 생성기원과 인간들의 조상이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기록된 성경말씀을 분명히 보고 듣고 알았습니다. 이런 기독인들에게 거짓의 달인인 사단이 다윈 같은 자를 보내어, "참으로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사람들을 창조하였다고 믿느냐?"며 시험 삼아 물어보게 한 후 그에 대한 반응을 살핍니다. 그러자 정직한 예수님의 말씀을 본성적으로 싫어하는 육에 속한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언행이 거짓이기를 바라는 뜻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는데"라는 미심쩍은 반응을 보이고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된 신이 참된 종교다 하고 뒤로 물러 서 버린 것이 바로 오늘날의 신학에 의해 탄생된 인조 신앙입니다.
예수님처럼 진리의 말씀을 갖고 선악 전쟁의 최전선에 나가 앞장 서 싸워야 할 기독인들이, 가장 높고 분명하고 정확하고 정직한 진리의 말씀을 자신의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삶 속에서 증거해 보이지 않고, 육신의 육감(肉感)에서 나온 학문적 잣대로 관찰해 보고 연구해 규명할 수 있는 한낱 종교로 스스로 낮아진 것이 바로 인조 신앙인 신학입니다. 이런 신학(인조 신앙)은 오직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한 문장의 뜻에만 합당하도록 성경을 꿰맞춥니다. 이런 신앙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지킨 결과가 세상의 빛과 소금 노릇을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증거는 보일 수 없고, 오직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무속 신앙인으로 추락하게 만듭니다.
송사하는 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여도 재판관은 항상 그 옳다고 하는 말의 증거를 제출하도록 요구합니다. 마찬가지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도 아무리 기독인들이 예수님의 교훈만이 진리라고 주장하여도 그런 진리로 행한 산 증거, 곧 거룩한 심령으로 변화된 증거를 하나님께 제출치 못하면,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판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들이 진리라고 말한 그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산(실제) 증거가 없는데 사람들이 어찌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겠느냐 이 뜻입니다. 진실로 주는 자가 복이라는 말씀이 진리라면,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을 지키고 실행해 복을 가져야지, 자신(신앙인)들은 실행해 복받지 않으면서도 남들에게만 그 말을 믿고 주는 행위를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사기꾼 짓이지 선구자로서 할 짓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의 특기가 사물과 사건을 그냥 넘겨 보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또한 여느 과학자들보다 더욱 세심한 관찰력으로 신앙인들의 마음 속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말로 그들이 먼저 실행한 증거가 있어야만 비로소 그들의 믿음이 정직하다는 것을 인정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한 증거가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말도 증거해 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거룩한 순교자나 성도들처럼,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지키고 순종한 증거가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 또한 그들의 말과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세상에 증거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한1서 5:10) 하신 말씀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면 그 사람의 성품도 예수님처럼 변화되어가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언 8:14~16) 하심 같이, 정직한 치리자들이나 재판관들이나 지혜자(과학자)들이 증거를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그들로부터 자생된 지혜가 아니라, 모두다 하나님께로부터 물려 받은 지혜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토록 증거를 소중히 여겨 챙깁니다.
무엇보다 천하만민을 심판하려 오실 예수님도 증거의 소중함을 수없이 강조하였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요한복음 5:37) 하셨고 또,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한복음 8:17~18)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신 까닭은, 아무리 자기 쪽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주장)하여도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친히 증거해 주시지 않으면, 그 말은 한낱 예수님에 의한,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의 주장에 불과할 뿐, 우주만물과 모든 생명체들과 천하만민을 공히 만드신 하나님의 판결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한복음 5:31~32)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증거하는 말은 모두 자기 주장(이론)에 불과하여 신빙성이 없으나, 공명정대한 재판장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증거를 받게 되면 그것이 곧 진리의 말씀으로 선포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뜻에서 나온 말씀만 진리로 증거하시고, 사람들의 뜻이 조금이라도 가미된 말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 곧 진리로 인정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5:33~34) 하심 같이, 예수님은 자기보다 지위가 낮거나 능력이 약한 세례 요한이나 또 세상 사람들의 증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아버지)의 증거만 구하였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공정한 증거를 구하며 사람들을 가르치는 참된 선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 자기 수준과 같은 동료들이나 자신보다 믿음이 약한 자들로부터 받는 거짓된 증거로만 선생 노릇하려 합니다. 사람의 증거만 구하는 사람의 종 노릇하면서 예수님의 종으로 자처하니 이런 사기행위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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